[장편괴담] 지하의 어느 구멍 3 (끝)
번역: NENA(네나)
얘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던 거죠.
그 노인의 무기질적인 미소에서 한 순간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목 깊은 곳에서 제멋대로 울려 퍼지는 얼빠진 비명과 함께
저 역시도 B와 똑같이 훌라후프형 고리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눈을 뜨니 병실이었습니다. 머리가 멍했어요.
팔에는 주사바늘이 꽂혀있었고
저는 뒤로 젖혀져 누워있는 상태였습니다.
상반신을 일으키려는데만 3분 가까이 걸린 것 같아요.
창문 밖으로는 예쁜 저녁놀이 보였습니다.
병실에는 사람이 없었으며 개인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그저 멍하니 있었어요.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나타났습니다.
간호사는 꽤나 놀란 듯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대로 어디론가 달려가버렸습니다.
저는 그 상황에서도 멍하니 있을 뿐이었어요.
이후 담당의와 다른 의사 몇몇이 들어왔고
제게 무언가 물어보는 것 같았지만
저는 그저 멍하니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의식이 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방금 ○○군의 가족을 불렀어.
○○군은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단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제 괜찮으니까.」
의사에게 그런 의미불명한 말을 들었습니다.
일어난 이후로 시간 감각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얼마 후,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어린 여자아이가 울면서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17 : 地下のまる穴10[sage] : 2011/12/16(金) 10:30:14.46 ID:s+XHJkPg0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제 이름은 ○○이 아닙니다.
어머니라 이름댄 여성은 「다행이다... 다행이야...」 라며
울면서 기뻐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도 제게
「어서와, 오빠...」 라며 엎드려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 동생이 아닙니다.
제가 「당신들은 누구죠? 누구에요?」 라며 몇 번이나 묻자
의사는 「후유증으로 보입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괜찮을 거예요...」 같은 말을 늘어놨고,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은 여동생이라는 여자아이를
격려하듯 말했습니다.
「오늘 밤은 엄마가 계속 있어줄게.」
저는 누군채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고,
그때마다 의사에게
'나는 ○○도 아니고 어머니도 저 사람이 아니며 여동생은 없다'
라고 했으나 그때마다 의사는
「으음... 기억에 조금... 흐음....」 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군은 말이야, 2년 가까이 잠들어 있었단다.
그래서 기억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것 같아.」
의사에게 그런 말을 들었지만
저는 충격적인 감정조차 없었습니다.
현실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충격을 받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거죠.
의사는 말을 고르며 있는 힘껏 제게
격려의 말을 늘어놨습니다.
어머니라는 사람은 기억상실이라는 말에
쇼크를 받아 오열했고요.
저는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고 한 뒤
자리에서 나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발이 이상하게 무거웠고,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자 의사와 간호사,
여동생이라는 사람이 저를 도왔습니다.
18 : 地下のまる穴11[sage] : 2011/12/16(金) 10:31:44.59 ID:s+XHJkPg0
화장실에 도착하자
처음으로 그날 밤에 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이상하게도 눈을 뜨고 몇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때의 담력시험에 대한 일을
떠올리지 않고 있었어요.
갑자기 화장실이 아주 무섭게 느껴졌지만,
어깨를 빌려준 의사와 뒤따라온 어머니와
동생이 있었기에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용무를 마치고 거울을 보자
저절로 비명이 나왔습니다.
얼굴이... 제가 아니었던 거에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의 저는 엄청난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고,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 1개월 가까이 입원상태로 지냈어요.
저는 부모라 이름대는 남녀와 여동생이라는 여자아이,
병문안을 온 자칭 친구들과 자칭 담임선생에게
계속 「나는 ○○가 아니며 당신을 모른다」 고 말했습니다.
A와 B에 대해, 혹은 내 과거에 대해 기억나는 범위 내에서
계속 얘기했지만 모든 것은 기억장해, 기억상실로
정리되어버렸습니다.
A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B도 없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모두가 저를 설득했어요.
또한 다들 저를 아주 극진하게 대했습니다.
의사나 주변 말에 의하면 나는 하굣길에
자동차 옆에 쓰러져 있었으며 통행인에게 발견되어
그대로 병실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제게 들어오는 이 세계의 정보는
모든 것이 들어본 적 없는 것들 뿐이었어요.
예를 들면 '이곳은 카나가와 현이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카나가와 현이라는 곳을 모르며,
그런 곳은 제가 사는 곳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통화단위 역시 '엔'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고 도쿄도 처음 들어요.
일본 역시도 처음 듣는... 그런 느낌입니다.
19 : 地下のまる穴12[sage] : 2011/12/16(金) 10:33:31.15 ID:s+XHJkPg0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의사에게
'그럼 원래 뭐였지?' 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A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고
그저 '동급생 친구' 라며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아이는 없다' 라는 말만 되돌아올 뿐.
그 시설에 들어가 그 훌라후프를 넘었던 얘기를
의사에게 몇 번이나 필사적으로 설명했지만
「그건 잠들었을 때 꾼 꿈이다.」 라는 흐름만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사실은,
내 자신이
「나는 기억상실이다.
이전의 인생이나 세계들은 전부 잠들었을 때의 꿈이다.」
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기억상실이란 사실 위로
다른 인격, 다른 세계의 기억이 덧씌워지고 있다.」
라는 걸 스스로 믿기 시작한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어찌 됐든 저는 다른사람으로서의
인생을 사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퇴원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에게 이끌려
자택으로 되돌아가게 됐어요.
「기억나지 않니?」 라며 부모가 말을 걸어왔지만,
그곳은 생전 처음보는 집에 처음 보는 동네였습니다.
저는 카운슬링을 다니며 필사적으로
이 새로운 인생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제게 들어오는 단어와 정보는 위화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었습니다.
각 지역이름이나 나라명은 모두 처음 듣는 것뿐이었으며
옛날 역사나 역사상의 인물도 모두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단어는 위화감이 없었습니다.
TV나 신문, 의자나 리모콘 등의 일상회화는
전혀 위화감이 없는 거예요.
20 : 地下のまる穴13[sage] : 2011/12/16(金) 10:35:38.36 ID:s+XHJkPg0
맨 처음에는 가족들과 친숙하지 못해 경어로 얘길했고
속옷 빨래도 직접 했었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진짜 가족이라 여기게 됐고
이전의 인생들은 그냥 전생이나 꿈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나니까
이전의 인생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유일하게 선명하게 떠오르던
부모님의 얼굴과 형의 얼굴, 친구나 시골동네에 대해
떠올리는데 조금씩 시간이 걸리기 시작한거죠.
하지만,
그 마지막 날 밤의 종교시설에 대한 기억만큼은
정확하게 떠올랐습니다.
특히 그 만면에 미소를 짓던 노인의 얼굴은
잊히지가 않아요.
새로운 생활에 점점 익숙해질 쯤,
카운슬링 횟수가 점차 줄어갔습니다.
반년 이후부터는 고등학교에도 복귀했습니다.
20살부터 고3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거지만
친구들도 생겼고 즐거움도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TV방송도 본 적없는 것들 뿐이라 신선했어요.
카나가와 현은 도시였기에
도회지에서의 생활도 매우 즐겁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복귀하고 4개월 정도가 지날 무렵,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그 세계와 이 세계를 잇는
공통점이 나타났습니다.
정확히 여름방학.
저는 과제때문에 서점에서 책을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줄지어 꽂힌 책 중에 「○○○○」라는 문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종교관련 책으로
「○○○○」 라는 것은 틀림없이 제가 마지막 날 밤에
침입했던 신흥종교의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경악했고 곧바로 책을 들어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 는 이 세계에선 상당히 거대한
종교집단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21 : 地下のまる穴14[sage] : 2011/12/16(金) 10:36:31.14 ID:s+XHJkPg0
제가 있던 세계에선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무명의 신흥종교단체였는데, 이족에선 세계적인
종교단체였던 거에요.
이후 저는 그 종교와 관련된 책을 사서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그것은 의미없는 행위였습니다.
읽어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었죠.
돌아가기는 고사하고 누군가에게
제 과거를 증명할 수 있을만한 사실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얘기해봤자
「그건 의식이 없었을때 ○○○○가 꿈에 나왔던 것뿐」
이라는 말만 들을테니까요.
거기다 내게 친절하게 대해준 새로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걱정이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처럼 고등학교에도 복학했고,
과거의 얘기를 하지 않게 된 내게 안심감을 가지는
주변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카운슬링을 다닐 때의 고통도 고통이었으니,
저는 못 본 척하며 평범하게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17년이 흘렀고,
저는 현재 도내에서 일하는
극히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제와서 이런 일을 적게됐는가.
지난 달,
제 앞으로 꼼꼼히 봉인된 편지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익명으로 쓰인 편지의 내용은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어요.
당신도 저를 잘 알 것입니다. 당신을 찾는 데까지
굉장히 긴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라는 이름을 기억하나요?
편지는 반드시 다시 보낼테니 기다려주세요.
이 편지의 내용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됩니다.
당신의 약혼자에게도.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름을 ○○○라 불렀는데,
저는 더 이상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만
이전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편지가 온 일에 대해선 신기하게도
공포심도 기대감도 들지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 있어요.
그리고 상대는 지난 주,
2번째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22 : 地下のまる穴15[sage] : 2011/12/16(金) 10:37:07.93 ID:s+XHJkPg0
요약하자면
「당신이 알고 있는 내 이름은 ○○입니다.
당신은 기억나지 않겠죠?
아무래도 이곳엔 당신과 저만 온 것 같습니다.」
「이번 달 25일 19시
○○역 앞의 ○○에 있을 테니, 꼭 와주세요.
당신에게 급히 전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혼자 오셔야 합니다.」
이런 내용이 쓰여있었습니다.
저는 ○○라는 이름이 누구인지 일절 기억나지 않지만
만나러 가볼 생각입니다.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곳에 누가 있든 기억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날 밤의 멤버 중 하나라면 얘기하다 보면
누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가능하면 B였으면 좋겠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흔적을 남겨두려 합니다.
같은 글을 약혼자와 유일한 가족이 된
여동생에도 남겨둘 생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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